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겨울, 이 계절만이 주는 고요하고 깊은 정취 속에서 따뜻한 술 한 잔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연말을 앞두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잔잔한 풍경과 향긋한 향이 가득한 양조장과 와이너리를 찾는 여행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됩니다.
경기도에는 전통과 감성이 어우러진 술의 공간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닷바람이 포도를 품은 대부도의 와이너리부터, 전통의 맥을 잇는 막걸리 양조장, 그리고 술의 역사를 고요히 되짚어볼 수 있는 술 박물관까지. 이번 겨울, 당신의 잔에 담길 술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계절과 이야기, 그리고 사람이 담긴 한 모금의 온기일지도 모릅니다.
대부도 그랑꼬또 와이너리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에 위치한 그랑꼬또 와이너리는 한국 와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그랑꼬또'는 프랑스어로 ‘큰 언덕’을 뜻하며, 이름 그대로 이 와이너리는 1년 내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대부도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풍부한 일조량, 밤낮의 큰 일교차,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 등 포도 재배에 최적화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포도 품종 본연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살린 와인을 생산합니다.
1954년, 이 지역에 처음으로 캠벨얼리 포도나무 50주가 심어지며 그랑꼬또 와인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대부도 전체 면적의 약 30%가 포도밭으로 활용될 만큼, 지역 전체가 와인 문화와 함께 성장해왔습니다. 특히 이곳에서는 캠벨얼리뿐 아니라 청수(靑水) 포도를 함께 재배하며, 국내 고유 품종을 활용한 와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눈여겨볼 점은 그랑꼬또 청수 와인이 2025 경주 APEC 정상회의 공식 만찬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 와인의 품질과 가능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상징적인 사례로, 그랑꼬또 와이너리가 국내를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랑꼬또 와인의 스타일은 깔끔하면서도 풍부한 과실 향이 특징입니다.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쳐 떫은 맛은 줄이고, 과실 풍미와 부드러운 산미, 그리고 적절한 당도를 살려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완성합니다. 캠벨얼리는 딸기, 체리 등 붉은 과일의 향을 중심으로 부드럽고 산뜻하며, 청수 와인은 높은 산도와 미네랄감이 살아 있어 해산물이나 치즈, 가벼운 한식과도 잘 어울립니다.
와이너리 건물은 체험과 교육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방문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입구 오른쪽은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직접 시음할 수 있는 테이스팅 존, 왼쪽은 전시와 체험 공간으로 운영됩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기본 와인 테이스팅, 나만의 머그컵 만들기, 와인병 공예, 그리고 1~1시간 30분 분량의 포도밭 견학 + 와인 세미나 + 4종 시음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 와인메이커 김지원 대표의 직접 강의는 깊이 있는 와인 이해를 돕는 유익한 시간으로, 와인 입문자부터 애호가까지 모두 만족시킵니다.
겨울철에는 따뜻한 실내에서 와인을 시음하며 바깥의 고요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연말 커플 여행이나 가족 여행지로도 제격입니다. 예약은 전화(032-886-9873)를 통해 진행할 수 있으며, 사전 예약 시 원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원활히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랑꼬또 와이너리는 단순한 지역 명소를 넘어, 한국 와인의 품격과 정체성을 오롯이 담은 공간입니다.
화성 배혜정도가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의 한적한 시골길 끝자락, 조용한 마을 속에 자리한 배혜정도가는 단순한 양조장이 아닌, 전통주에 대한 철학과 정성이 오롯이 담긴 공간입니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여성 도가인 배혜정 대표가 운영하며, 여성 양조가로서 한국 전통주의 가치를 지키고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배혜정도가는 한국 전통주의 가치와 현대적인 감각을 결합해, 지역 농산물을 기반으로 한 고품질 탁주, 약주, 증류주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술은 곧 사람’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술에 인격과 정성을 담고자 하는 장인정신이 깊게 깃든 공간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빚는 막걸리는 단순한 발효주가 아니라, 시간과 자연, 사람의 손길이 어우러진 술로 평가받습니다.
대표 제품인 ‘배혜정 생막걸리’는 전통 누룩과 국산 쌀을 사용해 빚으며, 달지 않고 담백한 맛으로 특히 젊은 세대와 여성 소비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증류식 소주, 전통 약주 등 다양한 술을 소량 정성껏 생산하고 있어, 대량 생산과는 다른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배혜정도가는 막걸리의 고급화와 세계화, 그리고 고부가가치화를 목표로 설립된 양조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곳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생쌀 발효법을 통해 술을 빚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쪄낸 쌀(고두밥)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생쌀을 바로 발효에 사용하는 방식은 기술적으로 까다롭지만 곡물 본연의 맛과 풍미를 더 잘 살릴 수 있어 고급 탁주 제조에 적합한 방식입니다.
대표 제품 중 하나인 ‘호랑이 유자생막걸리’는 과일을 넣은 막걸리 중에서도 품질 면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2025 경주 APEC 정상회의 공식 건배주로 선정되며 세계에 한국 막걸리의 위상을 알렸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5%로 부담 없이 마시기 좋으며, 잔에 가까이 대는 순간 유자의 상큼한 향이 먼저 퍼지고, 한 모금 머금으면 달콤하고 산뜻한 맛, 그리고 부드러운 탄산감이 입 안 가득 퍼집니다. 이 술은 눕혀도 새지 않을 정도로 위생과 안정성이 뛰어나 현대적인 감각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배혜정도가는 정성이 담긴 다양한 전통주를 선보입니다.
- 우곡생주: 알콜 10%의 프리미엄 생막걸리로,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아 쌀 본연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 호랑이 막걸리: 배혜정 대표가 아버지인 전통주 장인 우곡 배상면을 기리며 만든 술로, 합성감미료 없이 생발효 방식으로 완성한 진정한 프리미엄 막걸리입니다.
- 부자(父子): 전통 누룩 향미가 살아 있는 정통 발효주로, 유백색 탁주 특유의 깊은 풍미를 지니며, 국내 최초로 유리병에 담긴 막걸리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제품입니다.
양조장 내부는 위생과 품질 관리를 위해 일반 공개되지 않지만, 입구에는 전시 및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사전 예약을 통해 막걸리 담그기 체험이 가능하며, 고두밥과 밑술을 섞고 물을 더해 1단 담금까지 진행한 후, 집에서 발효 과정을 지켜보는 프로그램은 술을 직접 만들어보는 특별한 경험이 됩니다. 또한 생산되는 주류 4종을 직접 시음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어 술과 문화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겨울철, 눈 내린 마당을 바라보며 따뜻한 막걸리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이곳은 북적이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오롯이 술과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이 있는 술 여행을 원한다면, 배혜정도가는 분명 의미 있는 목적지가 되어줄 것입니다.
포천 느린마을 산사원
경기도 포천 운악산 자락에 자리한 느린마을 산사원은 술을 주제로 한 박물관과 정원, 그리고 전통문화 체험공간입니다. 이름처럼 세월이 천천히 흐를 것만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술의 향과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곳으로 연말에 찾기 좋은 감성 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은 배상면주가가 운영하며, 우리 술의 역사와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자 만든 전통술 테마 공간입니다. 전체는 두 공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데, 입구 쪽 건물인 ‘느린마을 박물관’에서는 전통술의 역사와 문화, 다양한 전시와 시음 체험이 가능하고, 도로 건너편에는 ‘느린마을 정원’이라는 이름의 야외 전시장과 정원이 마련되어 있어 관람 중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됩니다.
먼저 박물관에 들어서면, 전통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도구, 그리고 술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관이 펼쳐집니다. 술 항아리, 누룩, 증류기, 도자기 등 실제 유물을 비롯해 각 지역 술의 특징과 전통 가양주의 계보까지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풀어낸 전시는 교육적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주세법으로 인해 사라졌던 가양주의 전통을 복원하고 재조명하는 콘텐츠는, 단순한 술 문화 소개를 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주생활 문화를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하 1층에는 한국 전통주 산업을 개척한 인물인 우곡 배상면 선생의 기념관이 있으며, 이어지는 시음 공간에서는 20여 종이 넘는 막걸리, 과실주, 증류주를 자유롭게 시음할 수 있습니다. 입장 시 제공되는 1회용 플라스틱 컵을 사용해 술을 맛볼 수 있으며, 각 술을 시음한 뒤에는 비치된 생수병과 퇴수용 대형 잔을 이용해 컵을 헹군 후 다음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술마다의 풍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이곳에서 시음할 수 있는 전통주는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먼저, 다양한 과일을 원료로 만들어 새콤달콤한 향과 고운 빛깔이 특징인 ‘심술’ 시리즈가 인기입니다. 특히 독특한 이름을 가진 ‘방탄복’은 국내 최초로 탄산이 첨가된 전통 과실주로, 복을 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복분자를 원료로 한 청량한 맛이 인상적입니다. 그중에서도 ‘복분자음’은 100% 고창 복분자를 사용해 만든 프리미엄 과실주로, 깊고 진한 풍미를 자랑합니다. 또한 대봉감으로 빚어 임금님의 수라상에도 올랐던 전통 감술, 깔끔하고 부드러운 ‘느린마을’ 증류주 라인업도 시음할 수 있어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천국 같은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리미엄 증류주의 경우 별도의 시음비용이 들지만, 그 외 시음 공간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안주가 준비되어 있어 시음 체험의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후, 도로를 건너 맞은편에 위치한 느린마을 정원으로 이동하면 또 다른 분위기의 전통 공간이 펼쳐집니다. 볕 좋고 바람길 좋은 너른 마당에는 600여 개의 술 항아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 위로는 전통 회랑인 세월랑이 이어집니다. 세월랑 아래를 걸으며 항아리 사이를 지나면, 술이 익어가는 향이 코끝에 은은히 스며듭니다. 정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누각 우곡루, 풍광 좋은 카페 다주헌, 물 위에 술잔을 띄울 수 있도록 설계된 유상곡수, 그리고 소쇄원을 모티브로 한 취선각까지, 조선시대 선비의 풍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 정성스럽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4인 이상이면 사전 예약을 통해 전통주 빚기 체험도 가능하며, 예약은 최소 1주일 전에 진행해야 합니다. 입장료는 4,000원이며, 운영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입니다.
포천 느린마을 산사원은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술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겨울의 차분한 정취 속에서 술이 익어가는 느린 시간을 함께 걷고 싶다면, 이곳에서 겨울날의 하루를 천천히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이 겨울, 술이 익는 시간을 함께 걷다
연말의 겨울 풍경 속에서 양조장과 와이너리를 찾는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땅과 계절이 빚어낸 재료, 사람의 손길과 시간이 만들어낸 정성,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부도의 포도밭에서 익어가는 와인, 전통을 계승하며 빚어낸 화성의 막걸리, 술의 역사와 철학을 품은 포천의 술 박물관까지—이들 공간은 단순히 술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장소를 넘어, 한국 전통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감성 문화 공간입니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한 잔의 술일 수 있지만, 이 술을 둘러싼 공간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오롯이 이 계절 속에 녹아 있습니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차가워진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여행. 이번 겨울, 몸과 마음이 천천히 따뜻해지는 술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잔잔한 시간, 술이 익듯 나도 익어가는 겨울이 될 것입니다.